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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성령을 따라 사는 삶 본문

칼럼/아가페크리스챤치유센터 계간지

영성, 성령을 따라 사는 삶

夜虹 2022. 7. 31. 12:50

"개신교의 영성은 수도원이 아니쟎아요? 산으로 가는 게 아니예요. 요즘 너도 나도 영성을 말하면서 피정이니 침묵기도니 하는데, 그거 좀 뭔가 현실도피적인 것 아닙니까?” 내가 영성을 전공하는 것을 알고 어떤 목사님이 다짜고짜 내게 건넨 말이다. 이 분은 아마도 요즘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영성에 관한 담론 자체에 불만이 많은가 보다. 어쨌거나, 이 분의 말을 분석해 보면, 여기에는 세 가지 대전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 수도원의 영성은 개신교의 영성이 될 수 없다, 2) 수도원, 피정, 침묵기도는 현실도피적이다, 3) 영성은 현실도피가 아니다. 아마도 이와 같은 대전제는, 그것이 맞든 틀리든간에, 적지 않은 개신교인들이 갖고 있는 영성에 대한 이해가 아닐까 싶다. 나는 이 글에서 영성이라는 말의 어원을 따져봄으로써 영성에 대한 바른 이해와 그것을 기초로 한 바른 영성훈련의 추구에 일조하고자 한다.

영성이라는 말의 어원을 알아보는 것은 영성에 대한 이론적 이해의 기초이다. 우리말 영성은 영어 spirituality 로부터 빌어온 것인데, spirituality는 라틴어 spirare로부터 왔다. spirare는 숨을 쉰다 (to breathe) 라는 일차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차적으로는 생명이라는 뜻을 갖는다. 동사spirare의 형용사형인 spiritualis는 사도 바울이 성령을 따른다는 뜻으로 사용한 헬라어 pneumatikos에 상응한다. 따라서, 영적이다, 라고 말할 때의 의미는, 성령을 따라 산다, 가 된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바울이 pneumatikos라는 말을 사용할 때, 이것은 육체적인 것, 세속적인 것, 혹은 물질적인 것의 반대되는 용어로 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중심적인 유아기적인 신앙에서 성령중심의 성숙한 신앙으로의 진보를 말하는 것이지 이원론 혹은 현실도피적인 신앙생활을 지시하지는 않는다.

영성이라는 라틴어 spiritualitate가 처음 사용된 것은 5세기 무렵, 제롬이 썼다고 전해지는 한 편지에서이다. 이 편지에서 저자는 갓 세례를 받은 사람에게 이제 ‘영성의 성장’ (progress in spirituality (spiritualitate))을 이루어 가라고 권면한다. 다시 말해? 이제 세례를 받고 새 사람이 되었으니 자기중심대로 살지 말고 성령을 따라서 살아야한다고 권면하는 것이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삶, 상당히 애매한 듯 보이는 말이지만, 사실 이것이야말로 영성의 본래적 의미인 것이다.

이 편지에 나타난 영성의 용법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영성은 세례, 곧, 죄의 정화의 연장선상에서 이야기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죄의 정화와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은 기독교 신앙의 두 축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16세기 개혁자 칼빈이 말한 이신칭의와 성화라는 영성형성의 2단계 이론과 상응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훈련(discipline) 혹은 금욕주의(asceticism)는 영성의 중요한 측면이 되고, 장로교회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칼빈 조차도 금욕주의적 훈련의 필요성과 현실성을 간과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4세기를 전후하여 이집트, 시리아,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나타난 사막수도자들의 삶은 이후 서방 수도원의 모태가 되는데, 그들의 삶은 지극히 단순한 것으로써, 내면성찰과 육체노동이었다. 내면의 성찰은 하나님과의 신비로운 일치라는 어찌보면 매우 고상한 목표를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예수를 따라 사는 삶의 한 방식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예수처럼 살기 위해서는 예수처럼 볼 수 있어야 하는데, 그 예수의 ‘봄’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내면의 성찰, 곧,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가졌던 40일간의 광야체험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라고, 수도자들은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내면의 성찰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요, 평생동안 지켜가야 하는 하나의 훈련이었던 것이다. 그들의 훈련은 늘 깨어사는 훈련이요 늘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훈련이었지, 현실을 떠나서 어떤 이상야릇한 체험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의 하나님의 현존(presence of God)을 매순간 향유하기를 원했던 사람들의 거룩한 욕심(holy desire)이 바로 사막수도생활이라는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개신교에서 수도원을 가질 필요와 의무는 없다 할지라도, 수도원적인 삶(monastic life)을 영위할 필요는 엄존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개신교인들이 수도원이라는 물리적인 형식을 취할 필요는 없다고 할지라도, 수도원적인 이상과 수도사들의 엄격한 내면성찰(examination of the consciousness)은 기독교인이라면 누구에게나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현실도피가 아니라 오히려 현실참여요 현실긍정이다. 시간과 공간 안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의 숨결을 느껴보려는 (to breathe the presence of God) 그 노력이 어찌 현실도피가 될 수 있겠는가. 그 노력이야말로 바로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이요, 성령의 인도를 갈구하는 삶이 아니겠는가.

영성은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이다, 라고 정의할 수 있다. 성령은 제도, 현실 윤리, 그리고 율법을 부정하지 않지만 동시에 그것들을 넘어서 활동하신다. 성령은 타율(heteronomy)이 아닌 자율(automomy)의 삶이요, 지배와 복종의 패턴이 아닌, 민주적이고 자발적인 커뮤니케이션과 선택의 패턴을 따라서 움직인다. 그래서 자연스럽다. 모든 것들은 성령 안에서 있는 그대로 드러나며, 모든 사람은 성령 안에서 자유롭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고후 3:17)

 

아가페크리스찬치유센터 계간지 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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