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전체 글 (117)
생각의 거미줄
신새벽의 어스름이 걷히자마자 보리와 함께 산책길을 나섰다. 보리와 내가 걸은 길은 늘 걷는 길이었다. 산책을 마치고 후정 데크로 올라섰을 때 나는 매실나무에 대한 가지치기와 여기저기 풀 정리 작업을 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보리를 데크 기둥에 묶어 놓았다. 낫, 갈퀴, 전정가위 등을 챙겨 다다른 작업 현장에서 상당히 긴 시간 동안 정리 작업에 몰두하는 동안, 보리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했고, 가끔은 예의 굵직한 목소리로 짖어대기도 하면서 나와의 공존을 입증하였다. 퀴퀴하고 눅눅한 구내식당의 분위기 쇄신을 위하여 모여든 동문 목회자들과 신학과 학생들이 어제 하루 종일 몰두한 일은 닦고 씻고 치우는 일이었다. 오색창연한 곰팡이를 부착하고 있는 것들을 모조리 밖으로 빼내어 털고 씻고 말리기, 300평 넘는..
금새 밤이 되었다. 형체가 있는 것들은 전부가 검은 색이고 형체가 없는 것들은 도리어 빛이 난다. 가까이 보이는 옆산의 정상에 늘어선 나무들의 형상은 제각각이고, 바로 눈 앞의 키다리 나무는 자유를 허락한 가지들에게 휘감겨 있다. 이 모든 것들을 응시하면서 나는 나 자신을 보지 못하고, 나는 내가 검은 색인지 총천연색인지 볼 수가 없다. 나는 경계선에 서 있고 경계가 바로 나 자신이다. 이것은 사실일 것이다. 유덕화 주연의 를 보면서 엄마와 나, 그리고 나와 딸의 관계를 생각했고, 두 사람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그들을 보다 확실하게 좌절시키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중풍으로 쓰러져 주인집 아들이자 '양아들' 격인 로저의 돌봄을 받게 된 아타오는, 영화의 제목처럼, 비록 요양병원에서의 만년이지..
적자를 기록한 작년 2학기와 달리 학교의 학생식비지원 결정 등 여러 조정을 거쳤으므로 올 해엔 구내식당 운영이 보다 원활하리라는 설렘과 기대를 안고 새 학기를 준비하던 지난 겨울이 아련한 기억 속에 되살아난다. 그래, 이번 학기 영업을 종료하는 시점이 되면 적어도 작년의 적자를 만회하고... 그러나, 헐, 웬걸, 아뿔싸, 띠용~ 생소한 이름으로 인구에 회자되다가 급기야 교육기관의 정상 개학을 무기한 연기시키고 이천만원 이상의 모금이 리모델링 비용으로 투여된 330석 규모의 우리 학교 구내식당을 더 없이 썰렁한 공간으로 만들어 버린, 그리고 마침내 우리 협동조합과 같은 소상공인의 공공의 적이 된 코비드-19은 달콤했던 상상을 산산조각내었다. 그리고 지금은 공공의 적조차도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 것 같다. ..
나만의 새로운 학기가 시작된 오늘, 두 과목의 1주차 수업을 위한 파워포인트 작업의 시동을 걸었고 부드러운 질주 가운데 마침내 밤에 이르렀다. 고척 스카이돔에서 벌어진 키움 히어로즈와의 경기에서 나의 오랜 연인 한화 이글스가 연장 12회에 2점을 뽑으면서 승리한 시각이 23시 30분 즈음이었고 이로 인한 흥분의 힘으로 파워포인트 작업을 조금 더 밀어 붙이니 온건한 성취감이 발생한다. 오늘도 비가 내렸다. 연구실에서 작업을 하다가 굵어진 빗줄기 소리를 의식했을 때, 친구가 방문한듯, 반갑다, 고 느꼈고 기분이 괜찮았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불꺼진 연구실이 살포시 어둑해졌는데 전원 스위치를 올리기까지 잠간 동안 마치 흑백영화 속으로 들어가 있는 듯 했다. 밝아진 연구실이 드넓어 보였다. 쨍하고 해뜰 날 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