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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거미줄
'다음 주부터 예전 방식대로 월요일 아침 7-9시에 운동하겠습니다’ 노회 축구단 감독님으로부터 온 메시지는 우수에 내린 비만큼이나 달콤하고 친근했으며 이사야의 예언만큼이나 환상적이었다. 공을 몰고 가다가 홀로 유유히 공을 밟고 넘어져 오른쪽 다리 복사뼈에 금이 간 몇 년 전 사건 이후 허리 통증이 시작되더니만 작년 봄에는 손흥민의 왼발 슛을 흉내내려고 한 것도 아닌데 왼발 슛을 날리려다가 상대 수비가 나보다 빠르게 공을 낚아채가는 바람에 다리를 허공에 날려버리고야 말았고 이는 길고 긴 물리치료 및 재활을 견인했으므로, 이제 축구는 그만 하라는 계시인가, 혹은 축구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는 영혼의 명령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요 몇 주간 달리기를 간간이 하던 차에 이 메시지를 받은 것이었다. 두 시간의 운..
아무리 봐도 인간세는 무질서 그 자체인데, 우리 집에는 질서 그 자체가 하나 있으니... 구운 빵과 커피 한 잔을 소파로 가져와, 노트북을 연 채, '혼밥'을 하는 이 아침, 어느 새 보리가 소파 아래 쪽에 와 있는 걸 발견한다. 내 손에 먹을 것이 있는 이상 단 한 번도 무관심한 적이 없고, 옆이나 아래에서 껄떡대지 않은 적도 없으며, 그렇다고해서 반려인의 손짓을 무시하고 행동하지도 않는다. 계속 바라보기만 한다. 이 모든 게 규칙적이어서 편안할 지경... 어쩔 수 없이 빵 한 조각의 절반을 주게 되고 나는 익숙한 흥분을 선물로 받는다. 페이스북 2021.2.8
아마 가까이에 있었으면 매일 찾아갔을지 모른다. 나를 거기에 처음으로 데려다 준 사람은 전주 토박이로서 모종의 열정과 여유를 동시에 지닌 사람이었다. "서울에서 내려온 사람들은 유명세를 탄 '쩌기'를 찾아가지만 저는 항상 여기에 와요. 조미료를 쓰지 않아서 담백하거든요." 재래시장의 그 클래식한 허름함, 좁음, 그리고 밝지 않음을 다 갖춘 그곳은 당시 시장 한 귀퉁이를 겨우 버티고 있는 정도였다. 그 날 이후 몇 번인가 사람들을 데리고 간 적 있지만, 그 보다 더 자주 홀로 그곳을 찾았다. 한동안 심취했던 [고독한 미식가]라는 일본 드라마에 나오는 주인공만큼은 절대 아니지만 때로는 기대 이상의 만족감(물론 포만감도)을 선사하는 그곳에서 나는 기꺼이 혼밥을 자처하게 된다. 어제 12시 30분에 도착해서 나..
다락 창문 너머엔 아직까지 눈이 소복하고, 동트기 전이므로 흑백사진처럼 단아하고 고요하다. 크리스테바의 this incredible need to believe를 영적 독서 삼아서 읽다가 오랜만에 페북을 열었다. 궁리하면서 몇 글자 적는다. 함박눈이 비처럼 내리는 풍경이 눈에 들어오고, 또 눈이구나, 하고 중얼거린다. 어제 오후엔 학과 신설에 관한 러프한 아이디어를 들었고, 밤에는 학부 정시모집의 다소 초라한 결과표를 이메일로 전해 받았다. 불현듯 교정의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는 낡고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그런 계단을 오르고 내릴 때 한껏 조심하는 나의 모습도 연이어 떠오른다. 회사원마냥 몇 주간을 보낸 후 이전에 쓰다 만 논문을 이어서 쓰려는데 발동이 쉬이 걸리지 않는다. 연구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