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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거미줄
짝 없는 매미의 가녀린 울음소리마저 반가운 오후다. 땅도 공기도 서서히 말라가고 있는 것 같다. 다시 비가 내리면 다시 주춤하거나 위축될 테지만 그래도 한 여름 특유의 드라이한 기운이 현재로선 만족스럽다. 일전에 조금 보다가 졸음에 떨어지고야 말았던,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를 제대로 보았다. 화면이 좋았고, 음악도 좋았고, 스토리도 매력적이었다. '코즈'(the Cause)라는 신흥종교의 창시자, 마스터를 만난 프레디의 삶의 여정이 어떻게 반-마스터, 반-힐링, 반-강박적 의존으로 귀결되는지 혹은 질문에 답을 구하는 자에서 어떻게 질문 자체로서, 질문하는 자로서, 스스로 마스터로서 살아가게 되는지 보여주는 이 영화를 가을 학기 교양과목 의 커리큘럼에 포함시켜야 할 것 같다. 욕망을 가진 자로서 직장생..
아직 어스름한 새벽, 묵직한 빗소리에 홀려 마당으로 나갔더니 집수정 부근에 물이 흥건하다. 집수정 창살 밑으로 설치한 모기장 표면으로 토사 및 이물질이 싸여 물빠짐이 충분하지 않은 까닭이었다. 곡괭이를 이용하여 꽉 조여진 집수정과 모기장을 함께 들어올리니 가운데로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물이 빠져 나간다. 물 빠져 나가는 소리는 우렁찬 빗소리에 흡수되어 자신을 주장하지 못한다. 개강 1주일 전까지 1-3주차 수업 동영상을 미리 제출하라는 교무처의 공지가 배달된지 며칠 되었다. 아직 수업계획서를 완료하지 못한 교과목들이 있어서 동영상 제작에 돌입하지는 못한 상황이다. 협동조합과 관련하여 처리해야 할 일들이 또한 있어서 동영상 준비에 필요한 시간이 넉넉하지는 않을 것 같다. 코로나 19 위기로 인하여 지난 학..
"와~~ 식당이 많이 바뀌었네요!!“ 지난 3일 있었던 시무식 중식 만찬에 참여한 외부인사가 줄서서 기다리며 던진 말이다. 그의 감탄은 1년만에 구내식당을 방문했기 때문이리라. 그의 상기된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주변 환경에 민감한 나같은 사람에게 식당은 배를 만족시키는 곳이기 이전에 눈을 만족시키는 곳이다. 예수병원 근처 미가옥이라는 곳은 콩나물국밥도 일품이지만 일자 형의 좁은 식당의 한켠이 훤하게 드러난 주방이어서 식당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친근감과 역동하는 힘을 자극한다. 우리 학교 구내식당은 배식대 근처 벽을 문학동아리 회원들의 칼리그래피 전시공간으로 삼았고, 홀을 구획하면서 책장을 세워 놓았고, 내빈실의 경우 백열등 조명을 활용, 가끔 테이블도 이쁘게 꾸며 보려고 했다. 뻔한 말이지만 흑자..
초등학교 시절 부친개(김치?)를 만들고 났을 때 엄마가 하는 말, "야, 니네 고모보다 훨씬 잘 한다." 이 말(의 덫) 탓인지 40년의 세월이 지난 어느 날 나는 내가 일하는 직장 구내식당에서 김밥을 말고 있었다. 2학기 영업 종료 하루 전, 구내식당의 '개이득' 이벤트 추첨일(이전 10일간 매 끼니 식권 구입자들에게 번호표를 배부, 당첨자에겐 다음 학기 중식 무료 패스 제공 약속) 중식 메뉴를 김밥, 떡볶이, 그리고 오뎅으로 하겠노라는 영양사님의 선포에 이어, 장난인지 진심인지, 교수님 포함해서 당일 아침에 김밥 삼십 줄씩 싸야 한다는 조리장님의 말(의 덫)에 걸려 나는 아침 9시 반에 주방으로 향했다. 거기엔 이미 계란 지단, 햄, 우엉 등의 재료가 준비되어 있었다. 오메, 김발도 없는데, 김밥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