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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거미줄
주택으로 이사한 후 철쭉이나 꽃잔디를 심고자 했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얀색에 대한 호감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분홍색 철쭉은 상투적인 고혹스러움 속에 차차 현현하는 반면, 하얀색 철쭉은 마치 부활의 아침처럼 갑작스럽고 기묘하게 다가오곤 했다. 몇 해 전, 무작정 심은 씨감자로부터 줄기와 가지가 무성해지던 어느 날 하얀 색 꽃이 여기저기에 나타난 것을 알아차렸을 때도 사뭇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러므로 서너 주를 제외하고는 꽃을 틔우지 못한 올해의 감자 밭에서 내가 모종의 애처로움을 갖게 된 것은 이해할만하다. 인터넷 박사님에게 물어보니 토양의 영양상태가 별로이거나 품종 자체가 꽃을 틔우지 않기도 한다고 한다. 꿀벌들의 개체수나 활동력 부족도 이유로 거론될 수 있을 것이다. 올 해 감자를 심은 구..
첫째는 집 나이로 스무 살이 되었고 둘째는 얼마 전 여섯 살이 되었다. 개의 나이는 사람 나이에 일곱 배를 더한다고 하니 둘째는 마흔 살이 넘었다고도 볼 수 있겠다. 그렇지만 식구 중 하나는 그런 식으로 동물의 나이를 계산하지는 말자고 채근한다. 고창군 공음면에서 완주군 구이면으로 호적을 옮긴 둘째, 보리는 그 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저런 포즈로 하루의 상당 시간을 보내는 것 같다. 조용하고 소심한 게 우리 식구의 일원이 되기에 충분하고, 깊고 길게 사물을 바라보는 한에 있어서 우리 식구의 가장답다. 저 멀리 보이는 것들, 집 밖에서 들리는 가늘고 희미한 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다른 식구들의 경외감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할 지경이다. 오래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가도 평균..
뒷뜰 어정쩡한 곳에 자리한 매실나무가 여느 해와는 다른 삶을 살고 있다. 꽃을 늦게 틔운 건 여일했지만 열매를 이처럼 실하게 낸 것은 경이에 가까운 일이었다. 줄기에서는 군데군데 희뿌연 상처를 내보이고 몇 개의 가지로 갈라지는 병목 지점 주변엔 맑은 진액이 자신의 몸살을 조용히 토로하면서도 할 일은 충분히 한 셈이다. 수확의 시기를 몸소 가늠한다는 미명 아래 며칠 간격으로 하나씩 따서 씨앗의 강도와 과육의 신맛을 확인하다가 마침내 적정 시기를 놓치고야 말았다. 충청도 출신답다, 하고 혼자 생각한다. 그러나 한 템포 빠르게 전지 작업에 돌입함으로써 나는 전라도 사람이라고 또한 생각한다. 내년엔 해 거르기를 하게 될까, 아니면 올 해 이상의 과실을 낼까, 글쎄 나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일이므로 그냥 기..
매에 매혹된 것은 오래전 우연이었다. 자신의 몸의 길이보다 더 긴 날개를 펼치고 아무런 소리도 조금의 흔적도 남기지 않고 허공을 난다는 건 아무래도 비상한 일이다. 매가 나는 광경을 언어에 담기 어려운 까닭이 거기에 있을 것이다. 반려견과 함께 산책을 하다가 돌아오는 길,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아마도 세 마리의 매였던 것 같은데, 잠시 후 한 마리가 더 보였고, 한참 뒤에는 보다 더 가까운 쪽으로부터 다른 놈이 시각의 스크린 안으로 들어오는 통에, 각기 다른 아우라를 뽐내는 다섯 마리가 무질서의 질서를 따라 일말의 중단도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아직 비를 보지는 못했으니 충분히 우수(雨水)답지는 못한 날, 그래도 하늘은 충분히 흐릿하여 퍽 아쉽지는 않은 가운데, 태양 빛은 티 없이 밝은 게 아니라 흐릿..